▥ 나가사키의 가톨릭 역사
1549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가고시마에 상륙한 이후 일본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1562년 오무라 영주인 오무라 스미타다는 무역을 위해 토레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일본 첫 기리시탄(크리스천) 영주가 됐다. 1587년 기독교 세력을 감지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무라 영주 스미타다가 사망한 후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했고, 1597년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26명의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들이 처형되면서 이 곳은 일본 기독교의 본거지가 됐다. 지금도 나가사키현에는26인 성인을 기리는 순교지가 기념관으로 남아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 금교령을 공포하자 일본 각지의 신자들이 순교로 목숨을 잃었다. 1637년3만7000명이 살해당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포르투갈인의 내항을 금지하고 쇄국체제를 확립해 매우 엄격히 기리시탄을 단속했다.

1865년 숨어살던 기리스탄 한 명이 오우라 천주당에 찾아가 주임신부인 프티장 신부를 만나 신자임을 고백하는데 이것이 일본 기독교 역사상 기적이라고 불리는'신자 발견'이다. 250년 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금교령이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사제와의 만남은'우라카미4번째 박해'로 이어졌다. 메이지 정부의 기리시탄 박해가 여러 나라에 전해지면서 각 나라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이에 일본 정부는1873년 마침내 금교령 팻말을 철거하고, 신자들은 부활의 고백으로 자신들의 마을에 성당을 헌당했다. 잠복시대를 인내하며 지켜온 신앙은 지금도 나가사키 땅에 살아 숨쉬고 있다.
 
 

 
▥ 순례지 소개
 
■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1506년나바라 왕국(현재 에스파냐바스크)에서 고위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바라 왕국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와 에스파냐간의 전쟁(1512년-1524년)에서 에스파냐가 승리하면서, 그의 집안은 몰락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하급 귀족이 되었고, 형들도 몰락한 왕국의 군인출신이 되어, 어려운 생활을 했다. 하비에르는9세때 사제인 미켈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프란체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미켈 신부로부터 신학수업에 필요한 헬라어, 라틴어문학과 문법을 배운 하비에르 소년은 이들 언어로 된 가톨릭문헌을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신학이 깊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파리대학교와
성 바르브 학교(15년입학) 학생시절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알게 된 그는 예수회창립일원이 되었다. 성직자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게 된 하비에르는 사제서품을 받아'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다.
하비에르 신부는 인도고아 주에 도착하여 가톨릭교리해설서와 성가를 현지말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전교활동을 했으며,교회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고아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종교개혁 후 개신교로 전향한 사람들의 전도를 막기 위해 직접 선교에 나선 그는 포르투갈사람인 알파르스 선장을 통해 가고시마 태생의 일본인 부시 야지로를 알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바오로 디 산타후에), 야지로의 동생(요한네스), 야지로의 부하(안토니오)에게 예수회 교리를 가르쳐, 1548년3월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야지로가 포르투갈 말을 잘하게 되자, 하비에르는 야지로를 포함한7명의 일행(로마 가톨릭사제, 수도사, 중국인 봉사자 등)들과 일본가고시마에 상륙, 히라도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하비에르 일행은 이곳에서 다카히사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이묘는 크게 기뻐하며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그리스도교 책을 일본어로 발간했다. 하비에르 신부는 《공교요리》라는 그리스도교 교리해설서를 쓰기도 했는데, 이를 읽고 감명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를 일본 교회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예수회에 가입시켰으며, 로마에 보내 신학공부도 하게 했다. 얼마후에는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15명이 신자가 되었으며, 1년간의 전도로1백명에서1백50명이 신자가 되었다. 그 후 하비에르신부는 중국에서의 전도를 위해 1551년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이듬해11월27일에 광둥 성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별세하였다.1622년3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성 바오로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 히라도 하비에르 성인 기념성당
그리 주목할 것 없을 것 같은 작은 섬이지만 히라도는 이래 봬도 대항해시대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선이 연이어 들어오고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가 상관을 설치했을 만큼, 그리하여 서쪽의 수도라 불리며 번성했던 일본 최초의 남만南蠻무역항이다. 바야흐로 무로마치 막부 말기 일본 각지가 전쟁으로 혼란한 세월을 보내고 있던1550년,예수회 소속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가고시마를 거쳐 이곳 히라도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은 포교를 조건으로 무역을 하고 있었기에 교역을 통해 막강한 힘을 얻고자 한 영주들은 포교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히라도는 일본 그리스도교의 시작점이 된다. 수세기가 흐르고 옛 영화는 오간 데 없이 한적한 섬마을이 되었지만 곳곳에 이국적 정취를 풍기는 가톨릭교회와 성지가 남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찍이 가톨릭이 전해졌지만 어지러운 전국을 통일하려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1587년 선교사 추방령을 발령하고, 정권을 이어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1614년 금교령을 내리면서 ‘키리시탄’을 엄격하게 단속하기 시작했다. 키리시탄은 당시 포르투갈어로 가톨릭 신자를 가리키던 말로 지금까지도 일본의 가톨릭 신자를 키리시탄이라 부른다. 키리시탄으로 살고자 하면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때문에 히라도를 비롯해 나가사키현의 오래된 성당들은 대부분20세기 초에 완공된 것들이다. 옅은 풀빛을 머금고 있는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교회도1931년에 완공된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일반적으로 고딕양식은 중앙 첨탑을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첨탑들이 대칭을 이루기 마련인데 이 성당은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만 팔각탑이 자리한 비대칭 구조다. 이를 두고 불가사의한 경관이라고도 하는데 실은 성당을 지을 때2,000엔 정도의 공사비가 부족해 부득불 그리 되었다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성당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 소토메 – 시츠성당,  도로신부
나가사키시에서 북서쪽으로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넘어가니 푸른바다가 보였다. 거친 파도와 거센 바닷바람이 이곳이 소토메임을 알려줬다. 한자로 외해(外海)라고 표기하는 소토메는 동쪽의 오무라 만(灣)과 달리 바깥 바다와 맞닿는 지역으로 농·어업에 적합하지 않아 박해 이전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곳이다. 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척박한 땅을 선택했다.

소토메가 있는 오무라 영주의 영토는 일본에서 가장 교회문화가 융성하던 곳 중 하나였다. 1562년 일본 영주로서는 최초로 세례 받은 오무라 스미타다는 적극 영지에 신앙을 전파했지만 그가 죽고 박해가 시작되자 가장 큰 신앙의 땅은 가장 가혹한 박해의 땅으로 돌변했다. 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민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신앙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250년이었다.
능선을 따라 듬성듬성 솟아있는 건물 사이로 십자가가 달린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소토메 최초의 성당인 시츠성당이다. 낮은 지붕에 반듯하게 지어진 이 건물은 새하얗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런 꾸밈도 없다. 종탑과 십자가만이 이 건물이 성당임을 말해줬다. 박해를 딛고 신앙을 되찾은 소토메 신자들을 위해 파리외방선교회의 도로(Marc Marie de Rotz, 1840-1914)신부가 설계하고 지은 이 건물은 오로지 실용성에 중점을 둬 건축비용을 최소화했다.

도로 신부의 이름은 길가의 간판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에 와 죽기까지 평생을 소토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지금도 신앙을 막론하고 소토메의 아버지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도로 신부는 밀 농사를 가르치고 파스타 면을 만들어 나가사키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비싼 값에 팔았으며 어망 기술을 가르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소토메 지역의 경제를 살려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운젠 지옥
"주님, 주님의 손에서 저를 떼어놓지 마소서!"
 운젠 지고쿠에서 순교한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內堀 作右衛門,?~1627)의 간절한 기도다.
 
일본 최초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경관이 수려하고 많은 온천을 자랑하는 운젠(蕓仙). 이 아름다운 지대가 약 380년 전 일본 키리시탄에겐 천국을 가기 위해 꼭 거쳐야만 했던 지옥이었다.
 
에도(현 도쿄)막부 가톨릭교회 박해시절, 시마바라(島原) 영주 마츠쿠라 시게마사(松倉 重政)는 키리시탄을 굴복시킬 잔혹한 형벌을 고안해냈다. 바로 운젠의 뜨거운 유황물이 이글거리는 화산구에 신자들을 집어넣어 배교를 강요하는 '지고쿠 세메'(地獄責)이었다. 이때부터 나가사키와 시마바라에서 잡힌 키리시탄은 누구도 이 지고쿠 세메를 피해갈 수 없었다.
 
박해자들은 신자들을 발가벗겨 칼로 수십군데 베고 찌른 뒤 뜨거운 바위 위에 눕힌 뒤 열탕 물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그런가 하면 입에 재갈을 물린 채 밧줄에 매달아 열탕에 넣었다 건졌다를 반복했다. 피부가 벗겨지고 뼛속까지 화상을 입었다. 이같은 모진 고문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탕에 넣어 쪄 죽였다. 운젠 지고쿠 세메는 1627년부터 1632년까지 5년간 지속됐다.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이가 바오로 우치보리 사쿠에몬이다. 사제를 돕다 체포된 그는 시마바라에서 어린 세 아들 발다사르와 안토니오, 이냐시오의 순교를 목격했다. 그 역시 손가락이 잘리고 인두로 이마에 '切支丹'(그리스도인의 일본표기 - 키리시탄으로 발음) 이란 낙인이 찍힌 채 운젠으로 끌려와 순교했다. 운젠 순교자 가운데 지난해 시복된 26위와 1867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복자품에 오른 6위 등 총 32위의 순교 복자가 탄생했다.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조선인 이사벨라도 운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널리 공경받고 있다. 1629년 8월 3일 운젠으로 끌려온 그는 600여 명 구경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3일간의 지고쿠 세메를 이겨냈다. 고문하다 지쳐버린 형리들이 참다못해 "우리는 10년, 20년이고 계속할 것"이라고 하자 이사벨라는 "10년, 20년은 잠깐 사이, 100년이라도 나는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이 고통을 참고 그 시간을 행복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형리들은 그의 손을 잡고 강제로 '배교 서약서'에 서명하게 하고 내쫓았다.
운젠 30개 열탕 가운데 산 중턱에 있는 '오이토 지고쿠'에는 나가사키대교구에서 1961년에 세운 십자가 순교비와 이전 1939년에 설치한 비석이 있다. 십자가 순교비에는 안토니오 이시타 신부와 미카엘 나카시마 수사 등 순교 복자 6위 이름이 새겨 있다. 비석에는 시인 이쿠타 쵸스케가 순교의 피를 운젠의 붉은 철쭉에 비유해 지은 시 가운데 '성스러운 불이 타오르다'라는 싯구가 새겨 있다.
 
온천 관광지로 변해버린 오늘날의 운젠.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순교비를 무심하게 지나치지만 그 속에서도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장엄한 신앙고백이 이어지고 있다. 살과 뼈가 익는 고통을 이겨낸 순교자들의 신앙과 용덕, 그 믿음을 닮으려 침묵하고 기도하는 순례자들. 교회는 매일 매순간 부활의 신비를 살고 있다.
 
 
■시마바라 키리시탄
1549년부터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 전파된 기독교는 곧 시마바라 반도까지 확장됐다. 1600년대에7만여 명에 이르는 시마바라 반도의 주민 모두가 ‘키리시탄그리스도교도’이었을 정도로 포교가 활발했지만 도쿠가와막부의 금교령으로 곧 탄압이 시작되었다.당시 운젠지옥의 열탕은 배교를 강요하는 고문과 처형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1637년에 하라성에서 시마바라의 난1637~1638년이 발생해3만여 명의 신도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신도들은1873년 금교령이 철회되기까지250여 년 동안 숨어서 신앙을 이어 왔다. 운젠지옥에 세워진 순교자비를 포함해 시마바라 반도 곳곳에 성지순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시마바라 반도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하라성터(原城跡).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터만 남아 엄청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던 유명한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이 성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킨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농민3만7천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막부군12만5천 명이 하라성에서 농성을 벌이던 농민들을 진압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막부군도1만여 명이 사망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시마바라 반도와 아사쿠사 섬에 사는 사람들은 봉기를 일으켜야 했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농민들이, 백성들이 봉기를 하는 이유는 지배자들이 가혹한 탄압과 수탈이다. 시마바라와 아마쿠사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일본에서는 기리시탄으로 부르는 가톨릭 탄압이었단다. 시마바라 반도의 가톨릭은 구치노츠 항에서부터 시작됐다. 항구를 통해서 서구와 무역이 이뤄지면서 가톨릭 역시 전파되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시마바라 반도를 통치하던 다이묘 아리마 하루노부는 서구와 무역을 원활히 하려고 세례를 받으면서 가톨릭교도가 된다. 영주가 가톨릭교도가 됐으니 그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아리마 하루노부의 현명한(?) 선택으로 구치노츠 항은 서구와 무역으로 번창하게 된다. 아리마 하루노부 역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늘 그렇듯이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아리마 하루노부가 막부와 갈등을 일으켜 실각하고 참수형에 처해지면서 상황은 변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도쿠가와 막부는'기리시탄'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친다.
새로 온 영주 마쓰이라 가쓰이에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 혹독한 수탈을 시작했고, 더불어 가톨릭을 탄압했다. 세금을 내지 못한 주민에게 짚단으로 만든 옷을 입혀 불을 붙이는 잔혹한 형벌을 내렸고, 가톨릭교도들을 운젠지옥이라는 펄펄 끓는 온천에 집어던져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런 학정을 견디다 못한 시마바라 사람들과 아마쿠사 사람들이 힘을 합쳐 봉기를 일으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인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주자, 했겠지. 시마바라에서2만3천여 명이, 아마쿠사에서1만4천여 명이 봉기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민중 봉기를 주도했던 사람이 당시16세였던 아마쿠사 시로였다. 하라성터에는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역시 봉기가 진압되면서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민중봉기는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라성에서 농성을 하다 보니 식량이 떨어지고 무기 또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성을 둘러싼12만 명의 막부 군대를 농민군이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농민군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하라성 뒤에 있는 바다로 교황이 보낸 군대가 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단다. 끝내 성은 함락됐고, 3만7천 명의 백성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을까. 그뿐이 아니다. 하라성은 막부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파괴된 성은 시체들과 함께 묻혀서 이후350여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화승총 납탄을 녹여서 만든 십자가와 묵주알 등이 출토되고 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간절하게 원했던 농민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유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민중봉기를 하도록 만들었으니, 역사는 슬플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지녔나 보다. 이 민중봉기를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텅 빈 하라성에는 강제이민령으로 분고, 사츠마, 쇼도시마 등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 시마바라 성당
시마바라의 난 뒤에 크리스천이 전멸한 시마바라 반도에1902년 선교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1932년 시마바라 니노마루 성당을 건깁하고 1997년 현재의 돔형태 교회당이 건립됐다. 텐쇼 파견시절 중 금교령이 내린 뒤에도 시마바라 반도 쿠치노츠 등에 거점을 두고 활동한 나카우라 줄리아노 신부의 동상이 있다. 성당 안에는 일본의 기리시탄 박해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와 일본 교회의 실상을 알리고자 뽑힌 4명의 학생으로 로마 교황을 알현하고 유럽 문화와 기술을 익히고 돌아온4소년 사절단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성당은 시마바라의 난 당시 희생된 순교자들을 기리는 시마바라 순교자 기념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 26인 성인기념관
1597년 2월5일 당시의 장군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주교 금지령에 의해서 순교한 6명의 선교인과 20명의 일본 천주교 신자를 추모하기 위해1962년에 건립됐다, 1597년 26인의 크리스천이 여기서 가혹한 고문끝에 처형됐다.
기념관에서는 크리스천의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나가사키의 종’ 저자 나가이 다카시 박사를 기리는 여기당
우라카미 성당에서 도보로 5분 정도 언덕을 오르다보면 아주 초라한 판잣집이 하나 보인다. 이 여기당은 다다미 2장 남짓한 단칸방의 목조건물로, ‘남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如己愛人(여기애인)’을 뜻하는 말이 바로 여기당이다.
여기당은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생의 마지막 5년 반을 머물며 이 곳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와 사랑을 깨우치는14권의 책을 집필해 전 세계인을 감동시킨 곳이다. 여기당 안에는 나가이 박사의 살아 생전 물건들이 있다. 나가이 박사는 죽는 순간까지 여기애인의 삶을 실천해 일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다.
 
 
■ 평화공원
평화공원은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세계평화에 대한 신념을 담아 원폭 낙하 중심부에 세운 공원이다. 정면에 있는 거대한 평화기념상은 나가사키 현 출신의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의 대표작이다. 하늘을 향한 오른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상징한다.
 

■ 콜베 신부 기념관
콜베 사제는1930년부터 나가사키에서 약 6년간 일본 신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신학생 교육, 가난한 이들 구호를 비롯해 현 히코야마 중턱인 호고치에 성모의 기사 수도원을 설립했다. 1984년 폴란드 출신으로서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한 수인을 대신해 47세 나이에 아사형을 받고 독살됐다. 기념관은1971년 콜베신부 성인품을 기념해 지어졌고, 그의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 우라카미 주교좌 성당
우라키미 천주당은 천주교 탄압을 견뎌 온 신자들이 1895년부터30년의 세월동안 돌과 벽돌을 쌓아올려 완공 당시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교회로 동양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 대성당이라고 칭송받던 곳이다. 그러나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붕괴돼 주임 사제인 나시다 신부와 신도 20여명이 희생됐다. 그때 살아남은 신부들이1946년 목조로 된 임시 성당을 지었고, 현재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성당은 1959년에 재건됐다. 이후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일본을 방문하기 1년 전인 1980년에 벽돌 제조를 통해 정비됐다. 현재 일본의 천주교 교구중에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자랑하고 있는 성당이다.

 
■ 오우라성당
나가사키의 글로버공원으로 이어지는 언덕길 입구에 있는 흰색 교회로 정식명칭은 ‘일본 26인 성인순교자 천주당’이다. 1597년 나가사키에서 순교한 성인들을 기리기 위해1864년에 프랑스 선교사가 지었다. 건물 외관은 고딕과 바로크 양식이 혼합돼 있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천주당 안에는 약 100년 전에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돼 있고, 중앙으로 나 있는 계단의 오른편에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성당 옆에는 1875년에 건립한 라텐신학교가 있다.
 
■오무라 호코바루
아름다운 해안 도시 오무라(大村)는 16세기 후반 일본과 포르투갈의 무역기지로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였다. 오무라 가문 18대 영주 스미타다(純忠)는 1563년 세례를 받고 전국 다이묘(大名)가운데 최초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영내 키리시탄이 6만 명이 넘을 정도로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스미요리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키쿠레 키리시탄을 색출하지 않는다는 힐책을 듣고 1617년부터 박해를 시작, 체포된 키리시탄을 호코바루에서 처형했다. 1658년에는 동굴에서 기도하던 카쿠레 키리시탄 608명을 체포해 411명을 처형했다. 411명을 한 곳에서 처형할 수 없어 5곳에 나눠 같은 날 처형했는데 131명이 호코바루에서 순교했다.
 
가톨릭의 부활 신앙을 알고 있었던 오무라 영주는 순교자들의 부활을 겁내 131명의 참수한 머리와 몸을 500m 떨어진 곳에 따로 묻었다. 순교자들 머리만 묻혀있는 쿠비즈카(首塚)와 몸이 묻혀있는 도즈카(胴塚)에는 이들을 기억하는 순교자상이 홀로 서 있다. 호코바루 순교지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조선인 순교복자 13위 현양비가 순교자들의 믿음을 증언하고 있다.